밑줄2009. 10. 11. 21:09


캐비닛
김언수 문학동네
2006.12.21



176쪽
"나는 죽음이 뭔지 알아요. 그것은 시간을 입금해놓은 자신의 통장에 잔고가 하나도 안 남아 있는 상태죠. 이미 다 써버렸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차압당했거나. 별다른 건 없어요. 그저 파산한 삶을 복구할 잔고가 없는 거죠."

200쪽
"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질서는 안돼. 그러면 모두 깡통이 되어버려. 그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내면의 질서를 조용히 견뎌봐. 내가 각자의 특이성에 맞춰 시계를 줬는데 왜 아무도 그걸 사용하지 않는 거지?"
 이 우주적 가르침에 따르자면 한 개체가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의 사이클이란 언제나 '자신의 시간' 단 하나뿐이다. 우리에게 이해심이 부족한 게 아니다. 우리는 애당초 이해란 걸 할 수가 없다. 번개돌이는 달은, 달은 토끼를, 토끼는 번개돌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.

226쪽
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.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.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.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.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. "이봐, 실망하지 말라구.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.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."


Posted by 흘깃